티스토리 뷰
"그리고 싶은 거 없어요."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 것도 거부하던 아이가 30분 만에 종이를 한 장 더 가져와 이야기를 이어간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달라진 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놀이에 개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을 직접 겪고 나서야 이걸 이해했습니다.

도전 회피: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아이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이들 중에는 실패 민감성(failure sensitivity)이 높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실패 민감성이란,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 자체를 불쾌한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을 말합니다. 잘 못할 것 같으면 시작도 안 하고, 첫 번째 선이 삐뚤어지면 종이를 구겨버리는 행동이 이 성향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저희 아이도 그랬습니다. 유치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동물'을 그려오라는 활동지를 받아왔을 때, 연필을 들고 한참 종이만 쳐다보다가 "엄마가 사자 그려줘"라고 했습니다. "네가 한번 해봐"라고 했더니 "이상하게 그리면 친구들이 웃어"라면서 연필을 내려놓더군요. 처음에는 그림 그리기가 싫은 줄 알았는데, 블록도 설명서와 똑같이 만들 자신이 없으면 손을 대지 않았고, 종이접기도 첫 선이 삐뚤어지면 구겨버렸습니다. 그때서야 이게 단순히 그림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런 아이에게 "할 수 있어, 한번 해봐"라는 말은 생각보다 효과가 없습니다. 아동발달 연구에서는 이를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의 문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내재적 동기란 외부 보상이나 강요가 아닌 아이 내면에서 솟아나는 하고 싶다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외부에서 계속 "해봐"라고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이 내재적 동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반대로, 아이가 스스로 발을 내디디고 싶어지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오래가는 접근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른이 동그라미, 세모, 네모처럼 아이도 충분히 그릴 수 있는 모양을 먼저 제안하고, 이걸 발판 삼아 괴물이나 로봇 같은 스토리로 자연스럽게 확장해 가면, 처음에 "그리고 싶은 거 없어요"라고 했던 아이가 에너지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ZPD, Zone of Proximal Development)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접근입니다. ZPD란 아이 혼자서는 어렵지만 적절한 도움이 있으면 해낼 수 있는 범위를 뜻하는데, 이 범위 안에서 어른이 발판을 놓아줄 때 아이의 시도가 이루어집니다(출처: 한국연구재단 KCI 학술지).
- 실패 민감성이 높은 아이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자체를 피하려 한다
- "해봐"라는 말보다 아이가 이미 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발판 전략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 동그라미·세모·네모처럼 낮은 난도의 시작점을 제안하면 아이의 심리적 문턱이 낮아진다
- 어른이 먼저 서툴게 그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심리가 작동한다
놀이 개입: 일부러 못 그리는 것이 왜 자신감으로 이어지는가
어른이 놀이에 개입하는 방식 중에 "아이보다 조금 못 그리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참여한다"는 전략을 두고 의견이 나뉘는 편입니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주는 건 좋지만, 부모가 일부러 못하는 척하는 건 어색하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달랐습니다.
사자를 그린다면서 얼굴을 찌그러진 감자처럼 그리고 다리를 네 개의 막대기로 그렸습니다. 아이가 보더니 웃으면서 "엄마, 그건 사자가 아니라 감자잖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럼 네가 고쳐줘, 엄마는 사자를 잘 모르겠어"라고 했더니 아이가 제 그림에 갈기를 몇 줄 그었습니다. 잠시 후에는 사자 옆에 악당을 그리고, 자동차와 감옥까지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처음에 연필을 내려놓던 아이가 종이를 한 장 더 가져왔습니다.
반대로, 어른이 완성도 높은 그림을 척 그려서 보여주면 아이가 감탄하다가도 "나는 저렇게 못해, 엄마가 해줘"로 빠르게 넘어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특히 실패에 민감한 아이에게 어른의 능숙한 시범이 자극이 되기보다 비교의 기준이 되어 오히려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충분히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부러 못하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평가받는다는 부담을 아이가 내려놓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함께 엉성하게 그리고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가면서 전달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나는 네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보려는 게 아니라, 너랑 같이 놀고 싶은 거야." 이 메시지가 반복해서 쌓이면 아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안심하고 꺼내기 시작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가 그림을 좀 더 그린다거나 숫자를 빠르게 센다거나 입체물을 만든다는 몇 가지 모습만으로 아이의 강점과 약점을 단정 짓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수학적 감각이 강하면 공감 능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해석도 개별 아이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눈맞춤이 적거나 좋아하지 않는 활동에서 집중이 짧은 것은 당시의 피로도, 낯선 환경, 관계 형성 정도 등 다양한 맥락의 영향을 받습니다. 출처: 국립특수교육원에서도 아동의 행동 특성은 단일 관찰보다 다면적 맥락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이가 "재밌어?"라는 질문에 "자세히 모르겠어요, 더 해봐야 알겠어요"라고 했다가 바로 뒤에 "이번에는 승부를 꼭 내요"라고 돌아오는 장면을 보면서, 아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응 속도 차이가 이렇게 선명하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어른의 질문에는 무덤덤했던 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에너지가 확 살아났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아이가 새로운 걸 시작할 때마다 "못해"라고 하는데, 이게 자존감 문제인가요?
A. 자존감이 낮아서라기보다는 실패 민감성이 높은 기질적 특성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과에 민감한 아이가 반드시 자존감이 낮은 것은 아니며, 시작하기 전에 결과를 예측하려는 성향이 강한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못해"라는 말이 반복되고 시도 자체를 점점 더 피한다면, 아이가 실패를 경험해도 별일 없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 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Q. 부모가 일부러 못 그리는 척 하는 게 아이한테 거짓말 가르치는 거 아닌가요?
A. 이 부분에서 의견이 나뉘는 편입니다. '연기'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어른이 완벽하지 않아도 함께 놀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고 저는 봅니다. 아이가 "엄마도 이상하게 그리네"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나도 이상하게 그려도 괜찮겠다"는 경험이 됩니다. 의도적인 속임이라기보다는 아이의 문턱을 낮추는 환경 설계에 가깝습니다.
Q. 아이가 그림 그리기 중에 보이는 반응으로 성향을 파악할 수 있나요?
A. 놀이 장면에서 아이의 반응은 분명히 힌트를 줍니다.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지, 숫자나 공간 감각에 민감한지 같은 성향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한두 번의 관찰만으로 "우리 아이는 논리형이라 공감 능력이 부족하겠구나"처럼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피로도, 낯선 환경, 관계 형성 단계에 따라 같은 아이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Q. 아이가 자기 세계에 빠져서 말을 잘 안 들을 때 어떻게 하면 좋나요?
A.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 있을 때는 말로 부르는 것만으로는 주의가 잘 이동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어깨나 팔을 먼저 살짝 건드려 신체 접촉으로 주의를 이끌고, 그다음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면 대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보다 신체적 접촉이 먼저라는 순서가 핵심입니다.
결론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열 번 들려주는 것보다, 실제로 한번 서툴게 해보고도 즐거웠던 경험이 다음 도전으로 이어지는 훨씬 단단한 자신감이 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독려보다 실패해도 별일 없다는 경험 그 자체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꺼리는 아이를 앞에 두고 있다면, 먼저 어른이 엉성하게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아이가 "그건 이상한데요?"라고 반응하는 순간이 바로 아이가 발을 내디디는 입구입니다. 부모가 한 발 앞에서 끌어당기는 것보다 아이가 스스로 걸음을 뗄 수 있을 만큼 문턱을 낮춰주는 것, 그것이 더 오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